음악을 듣는 일은 때로 귀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한 장의 음반을 손에 들고 표지를 바라보고, 속지를 펼치며, 그 안에 담긴 이미지와 음악의 정서를 함께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더 디셈버리스트(The Decemberists)의 2003년 앨범 Her Majesty는 음악과 시각예술이 긴밀하게 만나는 흥미로운 사례다.

이번에 소개할 앨범 커버의 주인공은 캐나다 태생의 미국 삽화가이자 화가 카손 엘리스(Carson Ellis, 1975~)다. 그녀는 몬태나대학교 미줄라 캠퍼스에서 회화를 전공했고 프랑스 라코스트 예술학교에서도 수학했다. 에곤 실레와 막스 베크만, 독일 표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녀는 회화와 삽화, 출판 일러스트레이션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독특한 화면을 구축해왔다.

카손 엘리스와 더 디셈버리스트의 인연은 음악보다 먼저 한 사람과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몬태나대학교 시절 지금의 남편 콜린 멜로이(Colin Meloy)를 만난 뒤, 그의 대학 밴드 타키오(Tarkio)의 공연 포스터를 디자인하면서 본격적으로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콜린 멜로이가 이끄는 더 디셈버리스트의 상주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밴드의 시각적 정체성을 함께 만들어왔다.

그녀는 어린이책 삽화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트렌턴 리 스튜어트의 The Mysterious Benedict Society, 수잔 쿠퍼의 The Shortest Day, 콜린 멜로이의 The Wildwood Chronicles 등 여러 책에 그림을 그렸고, 뉴요커와 뉴욕타임스 등에도 편집 일러스트레이션을 선보였다. 2010년에는 일러스트레이터 협회 은메달을 받았으며, 2016년 출간한 Du Iz Tak?로 칼데콧 명예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삽화가로서의 명성은 한국에서도 소개됐다. 카손 엘리스는 2025년 10월 25일부터 12월 14일까지 수원 경기도서관에서 열린 그림책 작가 단체전 《깃털과 이끼》에 국내 작가들과 함께 참여했다. 이번 전시는 그녀 특유의 서정적이면서도 기묘한 이미지 세계와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을 한국 관객들이 직접 만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림책의 지면을 넘어 독립적인 시각예술로서 카손 엘리스의 작업세계를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현재 카손 엘리스는 남편 콜린 멜로이, 두 아들, 고양이 세 마리, 라마 세 마리, 염소 세 마리, 그리고 닭 몇 마리와 함께 오리건 주의 한 농장에서 살고 있다.

카손 엘리스의 작업은 한눈에 보아도 정서가 분명하다. 낯설고 조금은 기묘하지만 동시에 따뜻하다. 인물과 사물은 현실에 충실하게 묘사되기보다 감정의 흔적을 품은 채 등장하고, 화면에는 오래된 책이나 잊힌 이야기의 한 장면 같은 분위기가 흐른다. 바로 이런 감성이 더 디셈버리스트의 음악과 자연스럽게 맞닿는다.
더 디셈버리스트는 2000년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결성된 인디 록 밴드다. 콜린 멜로이를 중심으로 크리스 펑크, 제니 콘리, 네이트 쿼리, 존 모엔 등이 함께해 왔으며, 역사적 사건과 민속 설화, 오래된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가져오는 독특한 음악 세계로 잘 알려져 있다. 밴드명은 제정 러시아에서 1825년에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반란에서 비롯됐으며, 콜린 멜로이는 이 이름에 12월이 주는 드라마틱함과 우울함의 이미지도 담고자 했다.
더 디셈버리스트의 음악을 듣다 보면 오래된 항구 도시, 어두운 바다, 낡은 서신, 전쟁과 이별, 민담 속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현대 인디 록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정서만큼은 마치 몇 세기 전의 이야기꾼이 오늘의 청중 앞에 앉아 노래를 들려주는 듯하다.
오늘 선정한 음반 Her Majesty는 이들의 두 번째 정규 앨범이다.
특히 이 앨범의 커버는 카손 엘리스가 직접 작업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단순한 앞표지 한 장이 아니라 안쪽을 펼쳤을 때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긴 이미지가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전쟁과 참호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이어지며, 마치 오래된 삽화책이나 역사화의 한 장면처럼 음악의 서사와 시각적 분위기를 함께 끌어간다.

음반 커버를 펼쳐보면 음악과 그림이 서로를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더 디셈버리스트 특유의 문학적이고 극적인 노래들은 엘리스의 그림 속 인물과 공간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고, 반대로 그녀의 삽화는 노래가 품고 있는 시대와 정서를 보다 선명하게 떠올리게 한다.
Her Majesty의 매력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음악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지만, 앨범의 물성을 직접 경험할 때 더 깊은 감상이 가능하다. 앞면과 뒷면, 안쪽을 차례로 펼치면서 한 장면씩 바라보다 보면 단순히 음반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한 편의 그림책이나 짧은 역사극을 넘겨보는 듯한 감각이 생긴다.
이 앨범에서 들을 수 있는 Los Angeles, I’m Yours와 Song for Myla Goldberg 역시 더 디셈버리스트 특유의 서사성과 멜로디 감각을 잘 보여주는 곡들이다. 어느 한 장르로 단순히 규정하기 어려운 문학적 분위기와 인디 록의 감성이 공존하며, 콜린 멜로이의 목소리는 때로 이야기꾼처럼, 때로 등장인물처럼 곡 안을 움직인다.
한 장의 음반에는 음악만 담기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그림, 색감, 종이의 질감, 펼쳐지는 방식까지 모두가 기억이 된다. 카손 엘리스가 그린 Her Majesty의 커버는 그런 음반의 물성을 잘 보여준다.
남편의 밴드 음악을 이해하는 삽화가가 그 음악을 자신의 그림으로 번역하고, 다시 그 그림이 청자의 상상을 넓혀주는 과정. 이처럼 음악과 그림이 서로의 세계를 확장해 주는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여전히 음반 커버를 바라보고, 한 장의 앨범을 오래 기억하는 이유일 것이다.
오늘은 음악을 먼저 듣기보다 앨범의 그림을 천천히 펼쳐본 뒤 재생 버튼을 눌러보는 것도 좋겠다. 카손 엘리스의 화면 속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더 디셈버리스트의 노래와 만나는 순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한 장의 음반’의 즐거움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글 ㅣ 최재우 문화예술기획 제이비엠 대표



앨범 개요
아티스트: The Decemberists
앨범명: Her Majesty
발표연도: 2003
형식: 정규 2집
장르: 인디 록
앨범 아트워크: Carson Ellis
주요 감상곡: Los Angeles, I’m Yours / Song for Myla Goldberg
특징: 카손 엘리스가 작업한 파노라마 형식의 앨범 아트워크와 더 디셈버리스트 특유의 문학적·서사적 음악 세계가 결합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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