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언제나 사물의 진짜 모습일까. 익숙한 기억과 경험, 선입견이 겹쳐진 눈은 때로 같은 장면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이수희 작가는 바로 그 ‘본다는 것’에 대한 질문에서 자신의 회화를 시작했다.

 

그가 오랜 시간 이어온 대표 연작의 이름은 ‘RETINA(레티나)’다. 

 

망막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단순한 생물학적 기관의 명칭을 넘어 이수희 회화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이 됐다. 눈 안쪽에 자리해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신경조직의 형태를 밖으로 끌어내고, 그 위에 기억과 감정, 자연과 인간, 희망과 사랑을 겹쳐 놓는다.

 

미술사학자 황현숙은 이수희의 작품에 대해 “부드럽게 우리를 상상의 세계로 초대하는 동시에 우리의 경험적인 관찰력을 요구한다”고 설명한다. 특히 레티나 시리즈는 눈에 있는 신경조직 형태에 작가의 심상과 메시지를 담으며,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자연의 사실과 상상력이 공존하는 작업으로 읽힌다. 

눈 속에서 숲이 태어나다 

이수희의 그림을 처음 마주하면 가장 먼저 나무와 숲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우리가 자연에서 보아온 나무와는 조금 다르다.

 

줄기는 사람의 신경처럼 굽이치고, 가지는 서로 얽히고 갈라지며 또 다른 형상을 만들어낸다. 나무와 사람의 얼굴, 새와 꽃, 나비, 인체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이 화면 안에서 나타났다 사라진다. 관객은 한 번의 시선만으로 작품을 다 읽어낼 수 없다.

 

바로 여기에 이수희의 ‘RETINA’가 가진 흥미가 있다.

RETINA-The Snow Queen 46x162cm,oil on canvas, 2009

〈The Snow Queen〉에서는 푸른 화면과 나무의 형상 사이로 눈의 여왕과 동화 속 인물, 사랑과 이별, 그리움의 이미지가 중첩된다. 평론에서도 이 작품을 두고 레티나의 숲 안에 여러 형상이 숨겨져 있어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에게 하나의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나무를 보고, 누군가는 사람의 얼굴을 본다. 또 다른 관객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 속 어떤 장면을 떠올린다. 이수희가 그리는 것은 어쩌면 사물 자체보다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이미지’에 가깝다. 

‘투란도트’에서 붉은 생명의 나무까지 

작품세계는 문학과 음악, 자연과 인간의 내면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RETINA-Turandot2 112x162cm,canvas on장지,2009

2009년 제작된 〈RETINA-Turandot2〉에서는 짙고 어두운 화면을 가르는 강렬한 붉은 형상이 등장한다. 푸치니 오페라의 공주 투란도트를 연상시키면서도 인간의 신체 혹은 거대한 생명체처럼 보인다.

 

평론에서는 이 작품을 전통적인 장지 기법과 굵은 붉은 선, 금빛의 가는 선을 활용해 베일에 싸인 수수께끼의 공주를 표현한 작품으로 해석한다. 여러 겹으로 축적된 색의 깊이는 투란도트라는 인물의 신비성과 긴장감을 더한다.

 

반면 이후의 작품에서는 화면에 점차 생명의 기운이 스며든다.

RETINA-생명의 나무3,45.5x53cm,canvas on장지+분채,2015

RETINA-생명의 나무,8호원형,oil on canvas

〈RETINA-생명의 나무〉, 〈RETINA-Have hope〉, 〈RETINA-Spring〉 등에서는 나무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이자 희망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RETINA-Have hope,canvas on 장지+분채,2015

짙은 푸른색 위로 붉게 피어난 거대한 나무, 노란 화면을 가득 채우며 날아오르는 나비, 하얀 나무 사이로 비상하는 새, 꽃으로 뒤덮인 나뭇가지….

 

그의 화면 속 나무는 계절을 맞고 다시 싹을 틔운다. 가지 끝에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든다. 삶에는 상처와 어둠이 존재하지만 결국 다시 봄이 찾아온다는 듯하다.

RETINA-Spring,90.5x65cm,oil on canvas

평론 역시 작가가 추구하는 이러한 태도가 〈RETINA-Have hope〉, 〈RETINA-생명의 나무〉, 〈RETINA-Illumination〉, 〈RETINA-Spring〉 등에 잘 나타난다고 짚고 있다.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과정” 

이수희의 작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는 작가 자신의 말에 있다.

 

그는 ‘레티나의 시선’ 등의 작업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단순히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후천적인 습관과 경험으로 인해 우리가 보는 것 역시 왜곡될 수 있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 역시 그런 시선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이수희의 회화에서 ‘눈’은 역설적이다.

 

그는 눈을 그리면서 눈을 넘어가려 한다.

 

망막의 형태를 표현하면서 육체적인 시각이 아닌 마음의 시각을 이야기한다. 화면에 수많은 형상을 숨겨두면서도 관객에게 특정한 이미지만 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조금 더 오래 바라보고,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자신의 경험에서 한 발 물러서 바라볼 때 비로소 상대와 사물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꽃과 나비, 여성 그리고 시간으로 넓어진 ‘RETINA’ 

이수희의 작품에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몇 가지 이미지가 있다.

 

나무와 꽃, 나비, 새, 그리고 여성이다.

RETINA-Queen,45x53cm,Mxed Media,2013

특히 〈RETINA-Queen〉에서는 밝은 백색과 푸른빛이 화면을 채우고 꽃을 안은 여성이 등장한다. 현실 속 인물 같으면서도 꿈속에 머무는 인물처럼 느껴진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나비가 나무 주변을 자유롭게 비행한다. 고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는 나비는 생명의 변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읽을 수 있다.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나비와 새, 꽃은 ‘RETINA’가 단순히 눈의 구조를 탐구하는 연작에 머물지 않고 생성과 소멸, 상처와 치유, 기다림과 회복의 이야기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계 자체를 캔버스로 끌어들인 작품도 눈길을 끈다.

 

시간을 표시하는 실제 시곗바늘과 회화가 하나의 화면에서 만나는 순간, 작품은 ‘보는 것’에서 ‘살아가는 시간’에 대한 질문으로 이동한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한때 지나간 이미지는 다시 마음속에서 되살아난다.

 

그렇게 이수희의 레티나는 육체의 기관에서 시작해 기억을 저장하는 장소가 되고, 다시 삶을 바라보는 정신적인 창으로 확장된다. 

2007년 ‘봉황새의 비상’에서 2026년 ‘LOVE’까지 

작품들을 시간순으로 따라가 보는 것도 흥미롭다.

RETINA-봉황새의 비상,130x162cm,canvas on장지+아크릴

2007년 〈RETINA-봉황새의 비상〉, 2009년 〈The Snow Queen〉, 〈Turandot〉를 거쳐 2015년의 〈생명의 나무〉, 〈행복〉, 〈Have hope〉, 그리고 이후의 ‘Spring’ 연작까지, 화면의 분위기와 색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RETINA-생명의나무4.oil on canvas. 50X60.6cm.2015

초기의 화면에서 신경조직을 연상시키는 형상과 상징성이 강하게 나타났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나무·꽃·나비·새와 같은 생명의 이미지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최근 작업의 중심에는 다시 ‘LOVE’가 놓여 있다.

이수희 作

2026년작 〈RETINA-LOVE〉, 2025년작 〈RETINA-LOVE, SumiJo, Soprano〉, 2023년작 〈RETINA-LOVE, 오래보아야 사랑스럽다_DR. ESTHER〉, 2022~2023년작 〈RETINA-LOVE,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_DR. ESTHER〉, 2022년작 〈RETINA-Spring comes again〉 등이 주요 작품이다.

이수희 作

망막에서 출발했던 긴 작업이 이제 ‘사랑’이라는 보다 직접적인 언어를 향하고 있는 셈이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는 작품 제목 역시 이수희의 오랜 작업 세계와 맞닿는다.

 

자세히 본다는 것.

오래 바라본다는 것.

그리고 처음 보이지 않던 것을 마침내 발견한다는 것.

그것은 ‘RETINA’라는 연작이 오랫동안 반복해 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화가이면서 지역 미술현장의 기획자로 

이수희는 작업실 안에서만 활동해 온 작가가 아니다.

이수희 작가

협성대학교 예술대학 조형학부와 장안대학 응용미술과 공예·디자인을 졸업했으며, 개인전 8회와 350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화성시미술협회장과 사무국장·부지부장을 역임하고 화성시문화재단 기획전 및 개관전 운영, 삼성전자와 함께하는 화성시 미술작가 초대전 기획·운영 등 지역 문화예술 현장에서도 꾸준히 활동했다.

 

현재도 한국전업미술가협회 서양화 1분과 부위원장을 비롯해 한국국제조형미술협회, 미교전 운영위원회, 세계미술작가교류협회 등에서 활동하며 작품 제작과 미술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작가로서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동시에 다른 작가들과 지역 미술계를 연결해온 시간이다. 

결국 그의 그림은 ‘사람’을 향한다 

이수희의 작품을 여러 점 이어놓고 바라보면 서로 다른 시기의 그림임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모든 그림이 결국 ‘관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나무의 가지는 서로 연결되고, 나비는 꽃을 찾아 날아들며, 새는 숲을 떠났다가 다시 숲으로 돌아온다. 화면 속 인물과 자연 역시 서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그가 망막의 신경조직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상징적이다.

 

눈이 혼자 존재할 수 없듯 사람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지고, 상대방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순간 사람과 사람의 관계 역시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이수희의 작품 앞에서는 단순히 “무엇을 그린 그림인가”라고 묻는 것보다 “나는 이 그림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라고 묻는 편이 어울린다.

이수희 作

푸른 숲 속에서 누군가는 새를 발견하고, 누군가는 사람의 얼굴을 찾는다. 붉은 나무에서는 생명을 보고, 꽃과 나비에서는 사랑을 발견한다.

 

그 답들은 모두 다를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이수희가 오랜 시간 ‘RETINA’라는 이름 아래 그림을 계속 그려온 이유일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

 

그리고 그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잠시 멈추어 오래 바라보아야 한다.

이수희의 그림은 그렇게 관객에게 말한다.

 

“눈으로만 보지 말고, 마음으로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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