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가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말이다. 앙리 마티스의 회고를 통해 알려진 이 말은 르누아르의 삶과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철학처럼 다가온다. 극심한 관절염으로 손가락이 굳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그는 평생 인간의 따뜻한 표정과 일상의 행복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그림에는 절망보다 희망이, 어둠보다 빛이, 고통보다 삶의 기쁨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결코 평탄한 삶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난과 질병,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견디며 발견한 인간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었다. 

가난한 도자기 화공에서 인상주의 거장으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뱃놀이 일행의 오찬》, 1880~1881, 캔버스에 유채, 130.2 × 175.6cm, 필립스 컬렉션 소장

르누아르는 프랑스 리모주의 가난한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열세 살 무렵 도자기 공장에서 접시와 화병에 꽃과 인물을 그리며 생계를 도왔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소박한 노동은 훗날 그의 회화 세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그 과정에서 익힌 섬세한 붓질과 화사한 색채 감각은 평생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특징으로 남았다. 아름다움은 특별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상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는 감각도 이 시절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862년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한 그는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 프레데리크 바지유 등과 교류하며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당시 프랑스 화단은 아카데미와 관전인 살롱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 화가들은 역사와 신화의 영웅보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풍경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주목했다. 자연의 빛과 순간의 인상을 자유로운 붓질로 표현하려는 새로운 시도였다.

 

1874년 첫 인상주의 전시회는 이러한 도전의 결실이었다. 비평가들의 조롱과 냉담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존 미술 제도의 권위에 도전하며 회화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오늘날 세계 미술사를 대표하는 인상주의는 그렇게 관습에 대한 의문과 예술적 자유를 향한 열망 속에서 탄생했다.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한 삶의 아름다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 캔버스에 유채, 131 × 175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르누아르의 대표작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1876)는 그의 예술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파리 몽마르트르의 야외 무도회에서 사람들이 춤추고 대화하며 휴식을 즐긴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은 인물들의 얼굴과 옷자락 위에서 반짝이고, 서로 다른 움직임과 시선은 화면 전체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르누아르는 단순히 행복한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빛과 색채, 자유로운 붓질을 통해 평범한 일상의 순간을 예술적 감동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회화에서 행복은 소재인 동시에 하나의 표현 방식이었다. 인간의 얼굴에 머무는 따뜻한 빛, 서로를 향한 시선,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색채는 삶에 대한 긍정의 언어였다.

 

가족 역시 그의 예술에서 중요한 원천이었다. 아내 알린 샤리고와 세 아들은 작품 속에 자주 등장했고, 아이를 안은 어머니와 놀이에 몰두한 아이들의 모습은 아름다운 회화로 다시 태어났다. 훗날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된 장 르누아르는 그의 둘째 아들이었다.

 

르누아르는 이후 인상주의의 자유로운 색채 표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르네상스 회화의 고전적인 형태미를 탐구했다. 특히 라파엘로에게서 영감을 받아 인물의 윤곽과 풍만한 인체 표현을 발전시켰다. 그는 하나의 화풍에 안주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한 화가였다. 

고통 속에서도 멈추지 않은 붓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그네》, 1876, 캔버스에 유채, 92 × 73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그러나 르누아르의 말년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50대 이후 류머티즘 관절염이 악화하면서 손가락 관절이 변형되고 거동이 어려워졌다. 나중에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으며, 그림을 그리는 일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1915년에는 평생의 동반자였던 아내 알린마저 세상을 떠났다.

 

육체적 고통과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는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손을 보호하기 위해 천을 감싸고 도움을 받아 붓을 쥐면서까지 작업을 이어갔다.

 

놀라운 것은 육체의 고통이 깊어지는 동안에도 그의 화폭에서 삶의 온기와 풍요로운 색채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꽃과 여인, 햇빛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렸다. 이것을 단순한 현실 도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르누아르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고통을 견디는 방법이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육체는 쇠약해져도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하는 정신만큼은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의 삶은 예술이 고통을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인간이 고통에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도록 도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름다움을 선택한다는 것의 의미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테라스의 두 자매》, 1881,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 미술관 소장

르누아르가 활동하던 19세기 프랑스는 산업화와 빈부격차, 계급 갈등이 심화하던 격변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사회적 모순이나 비극적인 현실보다 웃고 춤추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이를 두고 현실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실제로 그의 회화가 당시 사회의 모든 현실을 담아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술의 역할이 반드시 시대의 어둠을 고발하는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지켜야 할 아름다움과 살아갈 이유를 일깨우는 것 또한 예술의 중요한 가치다.

 

르누아르에게 아름다움은 현실의 고통을 부정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도 인간이 잃지 말아야 할 삶의 가치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1919년 78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그림 속 사람들은 오늘도 웃고 춤추며 햇빛 속에 살아 있다.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어도 그의 작품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화려한 색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 치는 소녀들》, 1892, 캔버스에 유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우리가 그의 그림에서 발견하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며, 불완전한 삶 속에서도 아름다움은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크고 작은 고통과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때로는 현실의 무게에 눌려 삶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여유조차 잃어버린다.

 

그러나 르누아르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고통이 존재한다고 해서 기쁨까지 포기해야 하는가. 삶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아름다움을 꿈꿀 수 없는가.

 

행복은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 찾아오는 보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고통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우리가 발견하고 지켜내야 할 삶의 태도에 가깝다.

 

르누아르가 남긴 진정한 유산은 아름다운 그림만이 아니다. 삶의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바라볼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빛을 끝내 잃지 않으려는 인간의 의지다.

 

고통은 언젠가 지나가지만, 우리가 세상에 남긴 아름다움은 누군가의 삶에서 다시 빛이 된다.

 

글 ㅣ 김진혁 한국취업경제신문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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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칼럼니스트 kimjinhyuk@naver.com